부처님이 계신다면 序

다언(多言)은 사자(士子)의 병이 되고 번문(煩文)은 도가(道家)의 해가 된다.
도(道)를 밝힌 말이라도 다언(多言)과 번문(煩文)은 병이 되고 해가 되거늘 하물며 도를 밝히지 못한 산설(散屑)의 잡화(雜話)야 말할 것이 있으랴.

나는 본래 근성이 노둔(魯鈍)해서 문장지학에 힘쓸 여가(餘暇)가 없을 뿐 아니라 유시(幼時)로부터 유교전통적 (儒敎傳統的)인 도학가(道學家)에 투신하여 익혀 왔기 때문에 매양 고인(古人)의 난서부화(亂書付火)라는 훈계를 잠시도 잊지 않고 저술(著述)보다는 사색(思索),사색보다는 좌망(坐忘)을 노력해 왔다.
그리하여 단편적(單片的)인 문자도 남겨놓은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이번 이 소소(小小)한 책자는 여러 사람으로 더불어 문답(問答) 또는 강연(講演)한 것을 원고화(原稿化)하여 일반 학생들에게 일남(一覽)을 하게 한다해서 부득이(不得已) 이,삼자의 청(請)을 저버리지 못하고 간행(刊行)을 허락(許諾)한 것이다.

이 잡화(雜話)를 보고 혹 망매지갈(望梅止渴)의 일조(一助)가 된다면 다언(多言)의 병과 번문(煩文)의 해가 세상에 만연(蔓延)되지 않으리라고 본다.

庚申年(1980) 正月
五臺山人 呑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