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탄허학(呑虛學)의 용(用)
1. 교육사업(敎育事業)과 역경불사(譯經佛事)
1) 인재양성의 일승보살행 - 유교무류(有敎無類)와 회인불권(誨人不倦)
스님은 “공자가 정치를 그만두고 교육사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오늘날 공자가 있게 된 것”이라 하였다. 스님은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았으며 주지노릇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바로 공부 못 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김광식은 스님의 교육사업을 ‘교육결사’에까지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김호성은 ‘홀로결사’의 성격을 갖는 장기적인 인재양성이었다고 하였다. 화엄경의 번역도 사실은 오대산 수도원의 학인을 가르치기 위한 교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는데 스님은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를 가리지 않고 개방적으로 교육했다. 남녀노소와 승속을 구분하지 않는 이와 같은 확고한 교육신념을 가진 이를 근현대 한국불교사에서 찾아보기 매우 힘든다. 이와 같은 이례적인 상황을 한마디로 사람을 가르치는데 구분이 없었던 공자의 ‘유교무류(有敎無類)’와도 같은 교육방침으로 풀어볼 수 있겠다. 불교와 동양사상의 가치관을 방대하게 가르쳐서 한국불교, 나아가 국가의 인재로 양성해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일관된 교육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르침에 부류를 따로 두는 법이 없었던 것이다.
스님은 법상에 오르는 것은 싫어했으나 칠판에서 쓰면서 강의하는 것은 평생 마다하지 않았다. 박람강기(博覽强記)의 천재적인 기억력과 함께 엄청난 정진을 통해 유교, 노장, 불경까지 죄다 외울 수 있었으며 책 없이 강의했다. 사람을 가르치는데 전혀 싫증내지 않은 ‘회인불권(誨人不倦)’의 정신은 하루종일 번역작업을 하면서도 틈틈이 시간을 내어 매일 다방면에 걸쳐서 각종 경전들을 강의했다고 전해진다.
스님의 교육의 특징은 ‘종지(宗旨)가 없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는 것이다.
세속의 학문에서 안다는 것은 어느 한 쪽을 알면 다른 한 쪽은 모르는 것이다. 이것은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의 학문은 대상이 없다. 대상과 자기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대상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학문과 세속 학문의 차이이다. 수행자로서 종지(宗旨)가 없는 학문을 배우는 것은 삼가야 할 일이다.
이는 탄허학의 체(體)를 형성하는 종지(宗旨)가 탄허학의 용(用)인 인재양성과 교육불사에 있어서도 여실하게 이어지고 있는 증좌이다.
2) ‘한국적 역경(譯經)’ - 현토직역과 종지중심(宗旨中心)의 주석채택
청담(靑潭) 스님에 의해 한국불교사에서 이차돈 순교 이래 최대불사라는 평을 들었던 현토역해 신화엄경합론(懸吐譯解 新華嚴經合論) 47권의 역경불사는 전무후무한 대작불사였다. 15년 세월의 각고 끝에 원고지 10여만 장 분량으로 끝낸 이 화엄불사는 화엄경(華嚴經) 80권, 통현장자의 논(論) 40권, 청량국사 소초 150권, 현담 8권, 화엄요해 7권, 보조국사 「원돈성불론」 1권 등을 통합하여 토를 달고 번역·탈고한 화엄학의 집대성으로 혼자 힘으로 이루어 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 어려운 한국문화사에 길이 빛날 금자탑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본인은 ‘하루저녁 푹 잠을 자고난 기분’으로 화엄경을 원고삼매(原稿三昧) 속에서 써 내려갔다고 한다. 이 뿐만 아니라 사교(四敎)와 사집(四集) 등 모든 강원의 교재는 손수 현토하고 번역했다.
탄허스님 역경(譯經)의 특징은 현토(懸吐)를 철저히 했던 것과 아울러 직역(直譯) 중심의 번역이다. 청담스님이 종정을 하다가 다시 총무원장을 할 때 관응·운허·춘성·고암·탄허스님 등 20-30여 명의 큰스님들을 조계사로 모이게 했다. 청담스님은 이들에게 제안하기를 능엄경의 토가 통도사, 범어사, 해인사 별로 중구난방으로 다르니 이것을 통일시키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관응스님이 탄허스님이 만든 토가 제일 정확하고, 교재로도 쓰이고 있으니 따로 손질할 것이 없이 탄허스님의 것으로 하면 된다고 했던 일화가 있다.
스님이 현토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은 스님이 유불선 삼교특강 당시 천부경의 현토와 풀이에 관해 언급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님은 천부경을 석사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30-40년 동안 평생 천부경을 연구한 노인에게 가서 현토를 배워왔다고 하며 토 떼는 법이라도 알아두라고 하면서 외워서 새기고 해석하였다. 현토 하나만 완벽하게 되어 있으면 그 누구든 한문의 기본을 아는 이는 곧바로 풀이할 수 있기 때문에 한문교육에 있어 현토는 매우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스님은 모든 번역서에 반드시 현토를 병기하여 후학들로 하여금 명확하게 경문(經文)을 새길 수 있도록 해 두었다.
필자는 출가이전 태동고전연구소(지곡서당)의 청명 임창순(靑溟 任昌淳, 1914-1999년) 선생의 영향으로 현토를 통해서 한문을 해석하던 습관을 버리고 현토를 하지 않게 되었다. 중문학도이니 중국어 발음으로 읽을 수도 있었고 현토하지 않고 한문을 읽는 것이 원어에 가깝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탄허스님의 역경을 접하고 난 뒤 다시금 현토를 하고 있다. 중국어 특유의 성조가 없이 장단으로만 한자의 음률을 발음하는 한국어의 특징상 현토를 통해 음악성을 배가하고 현토의 원칙과 법칙을 숙지하면 한문 문리가 나기 쉽고 외우기 편한 장점이 있다. 또한 백문의 한문만 보는 것 보다는 현토가 되어 있으면 끊어 읽기가 보다 쉬워지며 직역과 해석에 용이점이 많다.
탄허스님 역경(譯經)의 또 하나의 특징은 직역(直譯)을 원칙으로 한다는 점이다. 처음 스님의 번역본을 보았을 때는 조금 난감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한자어를 우리말로 완전히 풀지 않고 한자어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다시금 해석해야 하는 부담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의역(意譯)을 하여 완전히 우리말로 풀이하면 훗날 시대적 한계에 부딪히는 단점이 발생한다. 언어는 매우 빨리 변하며 한 세대만 지나도 한자에 대한 우리말 풀이는 격세지감을 가질 수 있을 만큼 어색해 지기 때문에 다시 새롭게 의역해야 하는 치명적 단점이 있는 것이다.
수원 용주사에 역경하는 역장이 서고 역경위원을 양성할 무렵 탄허스님 역시 증의위원으로 그곳에서 번역도 하고 강의도 했다. 그때에 국어학자 최현배 선생도 함께 작업을 했는데 ‘생사윤회’를 ‘죽살이 바퀴돌이’와 같은 방식으로 완전히 풀어서 번역했다. ‘외솔’이라는 호가 대변하듯이 한글의 전용과 한자어의 완전한 우리말 번역을 주장하는 최현배 선생의 주장에 운허스님 등도 동의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운허스님의 화엄경에는 ‘생사(生死)’가 ‘죽살이’로 번역되어 있고 세주(世主)가 ‘세상 맡은 이’로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탄허스님은 이와 같은 번역은 오히려 중생들의 눈과 귀를 어둡게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반대했었다. 스님은 고유명사나 개념은 그대로 두면서 번역을 하되, 그것이 어려우면 가급적 괄호 안에다가 설명을 하는 식으로 번역을 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직역을 주장하는 탄허스님과 의역을 주장하는 운허스님의 이견으로 인해 스님이 용주사를 나오게 되었지만 당신은 직역을 하는 도매상이지 의역을 하는 소매상은 하지 않는다고 뜻을 굽히지 않았고 모든 번역에서 한결같이 직역을 원칙으로 했다. 직역을 위주로 하면 긴 생명력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한문의 원문에 현토를 하고 그 옆에 직역의 번역을 병기함으로써 한문의 실력도 향상시킬 수 있고 변화하는 언어의 사회적 유동성에도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 표본이 되는 번역으로 남을 수 있다. 의역은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창의를 발휘해서 각자의 몫으로 남긴다는 것이 스님의 취지였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스님의 역경을 ‘한국적 역경(譯經)’이라 표현했던 이유이다. 한국인이 한문을 보는 것과 중국인이 한문을 보는 것은 다르다. 주어-술어의 어순이 다르니 현토가 붙을 때 단락을 가르며 문장을 이어서 매끄럽게 읽을 수 있고 직역 위주로 번역을 해 둠으로써 거의 변하지 않는 한자와 달리 많이 변화하는 한국어의 변천에도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스님이 “나는 당대의 일은 하지 않는다” 했던 언명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는 대목이다. 먼 훗날을 생각한 스님의 속깊은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주석본(注釋本)의 채택에 있어서도 스님 역경의 특징이 드러난다. 스님은 “경을 보다가 의심이 나면 번역을 보고 번역을 보아도 모르게 되면 해(解)를 보고 해(解)를 보아도 풀리지 않으면 소(疏)를 보아서 경의 대의(大義)가 드러나면 해(解)와 소(疏)와 역문(譯文)을 다 접어두고 원경(原經)만을 숙독하는 것이 연구인의 자세라고 본다”라고 했다. 스님은 대표적 역경대작인 현토역해 신화엄경합론의 서(序)에서 다음과 같이 경보는 법에 대해 소언(일러두기)를 남겨두었다.
심불반조(心不返照)하면 간경무익(看經無益)이라는 고인의 훈고도 있거니와, 과연 언어문자 밖의 종지(宗旨)는 언려(言慮)를 돈망(頓忘)한 자득(自得)의 경지가 아니고는 추측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경(經)을 보는 방법은 경(經)을 읽은 후에 논(論)을 보고 논(論)을 읽은 후에 다시 경(經)을 읽어 재삼반복하면 흉중에 반드시 통철(洞徹)의 낙(樂)이 있으려니와, 만일 경론(經論)을 숙독하지 않고 먼저 소(疏)·초(鈔)를 심역(尋繹)한다면 대경(大經)의 종지(宗旨)를 파악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도리어 현애(懸崖)의 상(想)과 망양(望洋)의 탄(歎)을 면치 못할 것이다.
탄허스님은 화엄종사인 청량국사의 소초(疏鈔)보다 이통현(李通玄, 635-730년) 장자의 논(論)을 훨씬 중시했다. 통현론의 직절종지(直截宗旨)를 정(正)으로 삼고 청량소초의 자구해석(字句解釋)은 조(助)로 해서 엮었던 것은 바로 원경(原經)을 중시하고 종지(宗旨)를 중심으로 본의(本意)의 골절맥락을 파악하여 일심(一心)을 반조(返照)하는 것을 간경(看經)의 본질로 보았기 때문이다. 한암스님이 ‘화엄론은 참선하는 사람이 아니면 볼 근기가 못 되니 강당에서는 행세할 수가 없다. 그러니 현토하여 출판했으면 좋겠다’는 부촉이 종자가 되었던 것만 보더라도 애시당초 경전 번역 출간에 있어서 한암-탄허 사이에 묵묵히 계합한 바는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단박에 경안(經眼)을 갖추도록 안목을 향상(向上)시키고자 함이었다.
따라서 다른 경전의 주석본의 채택에 있어서도 스님은 자구(字句) 해석보다는 대의(大義) 중심의 저본을 채택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대승기신론의 경우 전통강원에서 사용하고 있던 현수법장의 현수소(賢首疏)를 완전히 배제하고 간결한 원효대사의 원효소(元曉疏)로 바꾸었으며, 원각경의 경우에도 규봉종밀의 대소초(大疏鈔) 대신에 더욱 간결한 조선의 함허득통의 함허해(含虛解)를 선택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원효소나 함허해가 대의와 종지를 잘 드러내고 간결하면서도 소략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석본으로 채택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는 점이다. 탄허스님의 의중에는 기왕이면 중국의 주석본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보다는 우리나라 고승들의 주석본 가운데 수승한 것이 있다면 한국 강원에서는 과감히 우리의 주석본을 저본으로 삼아 공부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스님의 노자 도덕경의 주석에 대한 채택방식 때문이다. 스님은 노자 도덕경을 역해하면서 주로 초횡(焦竑)의 노자익(老子翼)속에 등장하는 주석가들의 주석 가운데 취사하여 번역하고 스님의 짧은 논평을 부가했다. 예를 들면 소자유(蘇子由), 이식재(李息齋), 여길보(呂吉甫), 엄군평(嚴君平) 등의 주석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스님은 초횡(焦竑)의 주석에 등장하는 이러한 중국 주석가들의 주석보다 조선시대의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 1629-1703년)의 주석인 新注道德經의 주석내용을 맨머리에 올려 놓고 있다. 그만큼 우리나라 주석가의 주석을 중시하고 가급적이면 우리의 주석을 많이 소개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이처럼 주석의 채택방식에 있어서 이미 ‘한국적 역경(譯經)’의 색채가 농후하며 민족의식(民族意識)이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스님은 인도와 동남아 등 불교성지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후 인터뷰에서 ‘한국불교는 세계의 중심’이며 ‘한국이 세계불교의 종주국(宗主國)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이유는 불교의 진수(眞髓)인 교리(敎理)와 선사상(禪思想)을 그 어느 나라보다 모두 앞서 갖추고 있으며 특히 불교대장경의 보유가 으뜸인 곳이 바로 한국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인도에는 범어로 된 대장경이 나란타 대학의 화제로 한국이 보유한 팔만대장경의 만분의 일밖에 남아 있지 않으며, 티벳대장경 역시 한문 장경의 백분의 일밖에 안 되므로 세계에서 우리가 보유한 한문장경이 최상의 불교원전(佛敎原典)이 되어버렸다고 말했다. 게다가 한문장경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도 한국 뿐인데 그 이유는 중국은 공산화 과정에서 이야기할 필요도 없는 처지가 되었고 일본은 서구적 사고방식으로 동양사상을 연구하는 폐단이 있어 한문원전을 보는데 미흡한 점이 많으니 동양식 사고방식을 갖고 온전히 한문원전을 풀이하는 사람은 한국뿐이라고 역설했다. 불교의 종주국인 인도에서 장손(長孫)이 끊겼으니 지손(支孫)이 대신 가업을 이끌어야 하는데 대(代)를 이을 곳은 한국 뿐이니 우리나라가 세계불교의 새로운 종주국이 되어야 하겠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통해서 볼 때 스님이 한문으로 된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여 후세에 남길 때에는 이미 이와 같은 깊이 있는 사색과 고심을 통해 역경의 방식을 설정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온전한 팔만대장경을 보유한 뒷날의 불교종주국으로서 한문으로 이루어진 대장경을 소중하게 간직하면서도 현대인들이 어려운 한문경전을 한국어로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해 내기 위해서 한문경전을 그대로 현토를 통해서 먼저 제시하고 시대에 구애받지 않는 직역을 선택했으며 우리의 주석본이 있다면 과감히 채택하여 우리 국민이 우리의 사상가들의 사유를 맛볼 수 있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한문으로 된 대장경을 한문을 완전히 배제한 순수 한글대장경으로 변모시키는 것에 스님은 반대했다. 한국불교의 힘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고려대장경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므로 한문대장경을 잘 계승하면서도 시대가 아무리 흘러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현토와 직역, 해설과 강설을 덧붙이는 역경불사를 거행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파악한 탄허스님의 ‘한국적 역경(譯經)’의 진면목이다. 종지(宗旨)를 곧바로 드러낼 수 있으면서도 가급적 한국 주석가의 주석을 선택하고자 하였던 민족적 자긍심의 발로가 스님의 역경(譯經) 속에 고스란히 남아 후대에 길이 전해질 것으로 보인다.
3) 서문(序文)에 담은 골수법문과 대중강설의 사자후
탄허스님은 엄격하게 술이부작(述而不作)의 태도를 견지했으므로 성인의 경전을 현토·역해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개인적 저술을 남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허나 동양의 정통 선비가 자신의 살림살이의 전모를 공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서문(序文)이다. 개인적 문장이 아닌 번역본을 출판하게 될 때에도 반드시 서문은 갖추어져야 하는 것이기에 일반적으로 학문이 뛰어난 선학(先學)이나 스승에게 서문을 부탁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탄허스님은 모든 번역서에 직접 서문을 남겼다. 그 누구에게도 서문을 부탁하지 않았다. 자신감이었고 자존감이었다. 초서 서예로 손수 써서 책 서두에 활자본과 함께 실어 두어 당신의 소작(所作)임을 명명백백하게 밝혀 두었다. 즉 이 서문이야말로 바로 나 김탄허의 사상을 단도직입적으로 드러낸 골수법문이라고 천명한 것이다. 과연 그 서문의 내용들을 보면 하나의 경전에 대한 스님의 탁견(卓見)과 진수(眞髓)의 정미로움이 혼연히 녹아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스님의 교학(敎學), 경학관(經學觀)을 살펴보고자 할진대 반드시 모든 경전의 서문들을 분석하면 되리라 확신한다.
혜거스님은 금강경, 원각경, 능엄경, 기신론 사교(四敎)에 대한 탄허스님의 서문을 비롯하여 역대 제가들의 서문만을 한데 모아 분석 정리해 둔 바 있다. 또한 스님의 활달한 문장은 수많은 비명과 비문에 드러남을 감파하고 ‘탄허선사의 문학세계’로 별도로 정리해 놓고 있는데 이는 탄허스님의 심중을 깊이 헤아린 것이라 하겠다. 앞으로 탄허학이 본 괘도에 오르게 된다면 서문(序文)과 비문(碑文)을 면밀히 연구·분석함으로써 탄허사상의 총체적인 면모와 독창성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으리라 본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참으로 묘한 나라이다. 육당 최남선은 인도는 서론적 불교, 중국은 각론적 불교, 한국은 결론적 불교라 하였는데 과연 그도 그럴만한 것이 한국 땅에 어떠한 사상이 들어오면 반드시 이 땅에서 정리되고 요약된다. 불교가 들어왔을 때 원효는 ‘종요(宗要)’의 요문(要文)으로 정리하고, 의상은 ‘법계도(法界圖)’의 도상(圖象)으로 요약했다. 주자학이 들어왔을 때 퇴계는 ‘성학십도(聖學十圖)’의 도상(圖象)으로 정리하고, 율곡은 ‘성학집요(聖學輯要)’의 요문(要文)으로 요약(要約)했다. 한국 유교와 불교의 최고의 고수들은 ‘도(圖)-요(要)’의 방식으로 그 사상을 간략하게 요약·정리했다. 탄허스님 역시 부화한 번문을 싫어했고 종지가 활연히 간략하게 요약된 것을 선호했으며 본인의 서문 또한 원효의 종요(宗要), 율곡의 집요(輯要), 의상의 법성게(法性偈)와 법계도(法界圖), 퇴계의 성학십도(聖學十圖)와 요설(要說)과 동일한 방식으로 핵심을 요해(要解)했다.
또 한 가지 스님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것으로는 대중강설이 있다. 특강이나 대법회의 형식으로 열린 대중설법에서 스님은 책에서의 엄밀함과는 달리 종횡무진 사자후를 펼치고 있다. 녹음된 강설내용이 상당히 많은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제대로 녹취되어 책으로 출판되지 못하고 있다.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이 녹음된 상당설법 내용을 받아 적어 출판되어 스님의 핵심사상인 중도사상(中道思想)을 대표하는 저술이 된 것임을 상기할 때 탄허스님의 녹취되지 못한 강설과 설법이 하루속히 활자화되어 출간되기를 고대한다. 해주스님이 1977년의 화엄특강의 일부를 녹취하여 책으로 낸 탄허강설집-현토역해 신화엄경합론 권1이 거의 유일한 강설집인데 이 또한 후학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으니 보다 많은 강설집이 상재되어 스님의 사상이 세상에 빛을 발하게 되기를 발원한다.
2. 간산사상(艮山思想)과 민족불교(民族佛敎)
1) 탄허 역학사상에 나타난 우환의식(憂患意識)
탄허스님은 책이 없어 주역을 공부하지 못하다가 처가에서 소를 팔아 주역을 사주자 집에 돌아오지 않아 글방을 방문해 보니 흡사 미친 듯 춤을 추며 큰 소리로 주역을 읽고 있었다 한다. 18세 때의 일로 스님은 당시 주역을 손에 들고 오백독 하였다고 전한다. 그렇게 주역을 통달했던 스님은 주역의 대의에 관해 다음과 같이 피력한 바 있다.
우주 만유가 어디서 나왔느냐? 육십사괘다. 육십사괘는 어디서 나왔느냐? 팔괘다. 팔괘는 사상, 사상은 음양, 음양은 태극, 태극은 나온 곳이 없다. 태극, 나온 곳이 없다는 것을 소위 부처라고 한다.
태극은 일어난 데가 없어요. 일어난 자리가 없는 그 자리는 천당과 지옥도 없습니다. 그것을 해탈이라 그러는 거요. 그 자리로 소급시키면, 성인은 그 자리에 사는 겁니다. 그것이 역학(易學)입니다. 중생들로 하여금 근본자리로 소급을 하여 도통하게 하는 것, 그것이 주역의 대의입니다.
스님은 화엄경을 불교의 최고봉으로, 주역을 유교의 최고봉으로 보았다. “태극이 나온 자리를 알면 그걸 도통한 자”라고 했으며 “태극을 아는 것을 각(覺)”이라 했다. 탄허학(呑虛學)에 있어서 주역은 매우 중요한 대용(大用)의 지점을 점유하고 있다. 유교와 불교의 둘로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태극(太極)과 각(覺)이 일리(一理)로 회통되고 있다. 둘이 합해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불교(佛敎)의 체(體)와 역학(易學)의 용(用)이 일원무간(一源無間)한 것이다.
유교에는 주렴계의 「태극도설」이 있어서 유교의 제1구를 형성하고 있다. 주자의 근사록과 퇴계의 성학십도에서 수위(首位)를 차지할 만큼 주렴계의 「태극도설」은 유교의 본체이다. 이 주렴계의 「태극도설」을 탄허스님은 중국 선종5가 가운데 조동종의 오위도(五位圖)와 비교하여 ‘선역회통(禪易會通)’의 새로운 길을 계발(啓發)해 주고 있다.
「주자태극도 조동오위도 비교 (周子太極圖 曺洞五位圖 比較)」에서 스님은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이 태극도(太極圖)와 오위도(五位圖)를 좌우(左右)로 놓고 허심(虛心)으로 비교해 보면 유석이교(儒釋二敎)가 언설을 대(待)할 게 없이 신목(心目)사이에 소소(昭昭)하여 통철(洞徹)의 묘(妙)가 수지무지(手之舞之)하며 족지도지(足之蹈之)함을 불각(不覺)하리니 십삼권(十三經) 원경(原經)을 십백번(十百番) 독파(讀罷)하는 것보다 사과반(思過半)이 될 것이다. 이것은 내가 사십년전 입산후(入山後)에 이 글을 얻어 보고 감명(感銘)이 깊었었던 것이기에 이제 선해주역(禪解周易)을 역주(譯注)하여 간행(刊行)함에 있어서 부록(附錄)으로 하여 동도자(同道者)에게 제공(提供)하는 바이다.
주역이라는 책은 본래 희·문·주·공(羲·文·周·孔)의 사성(四聖)을 거쳐 체계가 완비된 것이다. 즉 복희·문왕·주공·공자 이 네 성인이 여민동환(與民同患)의 심심(深心)을 통해 구현해 낸 유교경전의 최고봉인 것이다. 주역계사전에는 작역자(作易者-문왕)이 우환의식(憂患意識)이 있었다고 한다. 즉 유리에서 환란을 당했을 때 문왕이 주역의 괘사를 지었는데 이때 세상을 근심하고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는 성인의 마음이 주역괘사에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근대 철학자 모종삼(牟宗三)은 중국철학의 특질에서 중국철학 전체의 특질로 이 우환의식(憂患意識)을 꼽고 있다. 내성외왕(內聖外王)의 도(道)는 바로 세상의 우환을 타개해 나갈 군자(君子)의 우환의식(憂患意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탄허스님의 역학사상은 64괘에서 태극으로 소급해 들어가는 선(禪)적인 심성(心性)의 수련의 ‘역학(易學)’과 태극에서 64괘로 확장되어 가는 현실적 전개에 대한 대처라는 ‘역리(易理)’에 대한 양면통찰이 있다. 스님은 주역선해 서문에서 ‘역학(易學)’은 64괘에서 태극으로 환귀(還歸)하는 것을 말하고 ‘역리(易理)’는 태극에서 64괘로 연(緣)을 따라 일체 사법(事法)을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태극이 곧 각(覺)이라는 말은 전자의 것이며, 정치·사회·문화적 전개양상은 후자의 것이다.
스님이 역리(易理)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학술적 연구를 통해 미래에 대해 길을 제시하고, 방향을 설정해 주며, 가닥을 잡아주고, 대안을 미리 설정해 주는 것은 모두 역(易)이 함유하고 있는 성현의 우환의식(憂患意識)과 군자학(君子學)의 발로인 것이다. 이 우환의식(憂患意識)은 불교교학적으로 보자면 일승보살도(一乘菩薩道)에 상응하고 화엄으로 보자면 보현행원(普賢行願)에 해당한다. 중생에 대한 광도(廣渡)·하화(下化)·요익(饒益)에 대한 끝없는 원력(願力)에 다름 아니다.
2) 중국역(中國易)에서 한국역(韓國易)으로 축의 전환
- 주역(周易)과 정역(正易)의 통합을 통한 지기(知幾)와 전망(展望)
스님은 우리가 우리 민족적 주체성에 서 본다면 불교를 제외한 최고의 철학은 주역이라고 하였다. 그 근거로 천부경을 제시하였다. 우리의 역사에서 국조 단군이 ‘여요병립(與堯竝立)’이라는 말로 볼 때 요임금과 동시대이고, 천부경은 단군의 사상이니 그렇다면 문왕의 주역보다 몇 백 년을 앞선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역학(易學)을 ‘우리 단군의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며 최초의 주역을 한국의 것으로 보아도 좋다고 했다. “우리 주역”이라는 말을 써야 옳다고 단정적으로 말한 것이 누 차례이다. 실제 스님은 당신의 지갑 속에 늘 토가 달린 천부경 원고 한 장을 써 넣어 가지고 다녔다.
본래 우리 나라의 역학(易學)이던 천부경에서 중국의 문왕의 역(易)인 주역이 나왔다가 다시금 복희역, 문왕역에 이어 일부역(一夫易)이 제3의 역(易)으로 한국 땅에서 나온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님은 정역이 책으로 출판될 때 두 번에 걸쳐 서문을 써 준 적이 있다. 박상화의 정역과 한국의 서문에서 스님은 김일부(金一夫, 1826-1898년) 선생과 정역(正易)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역(正易)은 연산(連山)에서 탄생(誕生)한 김일부 선생(金一夫 先生)의 저술(著述)한 바다. 일부(一夫)가 일찍이 수무족도(手舞足蹈)를 금(禁)치 못하여 주야(晝夜)로 가무(歌舞)와 궁리(窮理)에 정진(精進)하던 중 기묘년(己卯年, 1879년, 선생 54세)부터 그 팔괘도(八卦圖)가 수년간(數年間)을 허공중(虛空中)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일부(一夫)는 이것이 주역설괘전(周易 說卦傳)에 ‘신야자묘만물이위언자야(神也者妙萬物而爲言者也)’라는 대문(大文)의 말한 것과 부합(符合)됨을 확인(確認)하고 정역팔괘도(正易八卦圖)를 획(畵)한 선생(先生)은 계속 추연(推衍)과 연마(硏磨)를 쉬지 않아 드디어 정역(正易)을 내게 된 것이다.
복희팔괘(伏羲八卦)는 천도(天道)를 말한 것이라면, 문왕팔괘(文王八卦)는 인도(人道)를 밝힌 것이며, 정역팔괘(正易八卦)는 지도(地道)를 보인 것이다. 지도(地道)의 변역(變易)에 미리 모든 것이 변(變)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선후천팔괘(先後天八卦)와 정역팔괘(正易八卦)는 수미(首尾)의 도치(倒置)가 근본적(根本的)으로 다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주(宇宙)가 한 장중(掌中)에 있다 해도 과언(過言)이 아니지만 다만 그 문자(文字)가 난삽(艱澁)해 난해처(難解處)가 많아서 전문가(專門家)로도 쉽게 다루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이 책이 세상(世上)에서 빛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번 박상화선생(朴相和先生)은 그의 평소정력(平素精力)을 다하여 연구(硏究)한 결과(結果) 드디어 정역과 한국이라는 책자(冊子)가 나오게 되었다. 상세(詳細)하게 풀어서 누구라도 다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출간(出刊)의 즈음에 임(臨)하여 나에게 일언(一言)의 병언(幷言)을 청(請)하거늘 나는 정역학(正易學)에 전공(專攻)의 지식(知識)이 없는 사람으로 어떻게 서문(序文)을 쓰느냐고 거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 누차(屢次) 청촉(請囑)이 있어서 이 서문(序文)을 쓰게 되었다. 마치 우수마발(牛溲馬渤)을 주옥(珠玉)에 섞은 듯이 참괴(慙愧)를 금(禁)치 못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 책자(冊子)가 나감으로 해서 여러 사람들이 정역(正易)의 원리(原理)에 입각(立脚)한 불원(不遠)의 장래(將來)를 명철(明徹)히 투시(透視)하여 구출(救出)을 받게 된다면 세계일류(世界一類)의 공헌(貢獻)에 그 공(功)이 크지 않다 할 수 없을 것이다. (1978년)
누차 서문을 써 줄 것을 부탁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미 정역학(正易學)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이들로부터 탄허스님이 정역학(正易學)에 달통했다고 소문이 났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스님은 김일부 선생에 대한 향심(向心)이 대단함을 알 수 있고, 역학의 원리에 입각하여 정역팔괘가 어설픈 여느 도참설의 영역과 확실히 다르다는 점을 당신이 직접 검증했음을 알 수 있다. 유불선 삼교 특강에서도 스님은 반드시 정역학(正易學)을 강의했는데 김일부 선생에 대해 ‘아주 뜨겁게 아신 분’이며 ‘정역은 아주 위대한 작품’이라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위의 서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정역을 알게 되면 우주(宇宙)가 한 장중(掌中)에 있다 해도 과언(過言)이 아니며 정역(正易)의 원리(原理)에 입각(立脚)해 보면 세계인류를 구출하는데 크나큰 공헌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무렵에 씌여진 또 다른 정역 서문에서는 핵심만 압축하여 밝혀 두었다.
「正易 刊行 序」
복희는 선천의 선천이요, 문왕은 선천의 후천이요, 정역(正易)은 후천의 선천이다. 일부(一夫)의 말에 의하면, “물이 남쪽에 밀려왔다가(水潮南天) 물이 북쪽으로 밀려 나간다(水汐北地)”고 하며, 증산(甑山)은 “물이 불어서 나왔기 때문에 상극의 이치가 없다(水生於火故天下無相克之理)”고 하니, 이 즈음에 도를 얻기가 쉽고 그 사이에 말을 붙이기 어렵다. 아!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이치를 안다면 선천 후천의 변역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사년(1977년) 4월 4일 탄허 산인(散人)
김성철 교수는 스님의 역리해석(易理解釋)을 “탄허의 도참설” 내지 “탄허의 도참사상”으로 규정하여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역리해석(易理解釋)과 도참사상(圖讖思想)을 다소 혼동한 것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김교수는 탄허스님의 도참설의 결정적 근거이면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문헌이 정역(正易)이라 하였다. 하지만 탄허스님은 김일부(金一夫) 선생의 정역(正易)을 단순히 도참설로 보지 않고 있다. 도참사상이라 함은 미래의 길흉에 대한 예언을 믿는 것을 말한다. 탄허스님은 김일부 선생의 정역(正易)을 향후 100년간 벌어질 일에 대한 예언의 성격을 가진다고 하였지만 단순한 도참설로 보아 그 예언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다. 스님은 김일부의 정역(正易)을 새로운 시대의 역리(易理)로 보고 있으며 정역(正易)에 대해서 자신의 역리해석(易理解釋)을 부연하여 전개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마치 문왕팔괘(文王八卦)에 대해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역전(易傳)과 본의(本義)를 통해 역학(易學)을 전개해 나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문왕팔괘와 정주(程朱)의 전의(傳義)에 대해 도참설이라 말하는 이는 없다. 유교의 엄연한 경(經)과 전(傳)일 따름이다.
김일부 선생의 정역(正易)은 전체가 4769자(字)로 이루어져 있다. 탄허스님이 주역선해의 부록인 「정역팔괘해설」에서 인용하여 언급하고 있는 정역(正易)의 원문은 고작 79자(字)에 불과하다. 그러나 해설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79자(字)에 대한 해설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정역팔괘(正易八卦)와 정역(正易)의 상경(上經)과 하경(下經)인 「십오일언(十五一言)」과 「심일일언(十一一言)」 전체에 대한 체계적인 역학적 분석을 마친 해설을 부가하고 있는 것이다. 1982년 70세 5월에 현토역해 주역선해를 간행하면서 「정역팔괘해설」을 부록으로 남겼는데 이는 71세 입적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간행한 책으로 필생의 역작으로 남겨놓은 것이다.
중국역(中國易)인 문왕팔괘의 시대가 가고 한국역(韓國易)인 정역팔괘의 시대가 새롭고 도래함에 천지경위이천팔백년(天地傾危二千八百年)만에 한국땅에만 지축이 바로 서고 난 뒤의 상황에 대한 역학과 천문력이 모두 이미 준비되어 있다는 것은 중국역학이 한국역학으로 축이 전환된 것을 의미한다. 일부역을 공부해서 알기 위해서는 주역은 물론 소강절의 황극경세서와 같은 상수역(象數易)에도 통달해야 한다. 스님은 주역선해에서 소강절을 ‘소자(邵子)’라고 존중하고 있다. 단순한 술(術)의 경계에 머문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이러한 제반 역학적 검증을 마친 이후 스님은 당신의 주역선해 끝에 「정역팔괘해설」을 남겨 한국 땅이 세계문명의 중심이 될 것임을 지기(知幾)하고 전망(展望)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가 ‘예언(豫言)’이란 표현을 쓰지 않고 ‘지기(知幾)’라는 역학적 표현을 쓴 것은 탄허스님이 역학에 대한 깊은 탁마와 연구를 통해 다가오지 않은 움직임에 대한 기미와 조짐을 신묘하게 통달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지기(知幾)’는 주역 계사전에 나오는 용어로 “지기 기신호(知幾 其神乎: 기미를 아는 것이 신묘함이로다)”, “군자 견기이작(君子 見機而作: 군자는 기미를 보고 작한다)”와 같은 표현으로 등장한다. 다음의 주역 계사전 제10장의 구절을 통해서 탄허스님의 예지가 ‘지기(知幾)’였음을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역(易)은 성인이 심오한 이치를 극진히 탐구하고 기미[幾]를 연구한 것이다. 오직 깊이하였던 까닭에 천하의 뜻을 통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기미를 연구했기 때문에 천하의 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夫易聖人之所以極深而硏幾也. 惟深也, 故能通天下之志, 惟幾也, 故能成天下之務.)
3) 탄허 미래학의 특질과 상징
- ‘간산(艮山)’과 ‘추성봉(樞星峰)’으로 계승된 불국토사상
탄허스님의 미래학(未來學)과 민족사상(民族思想)을 총괄하여 필자는 ‘간산사상(艮山思想)’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그것은 스님이 출가하기 이전의 자(字)가 ‘간산(艮山)’이었고, 스님이 출가한 오대산이 삼국유사에 ‘간방(艮方)’으로 나와 있고, 스님이 마지막으로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던 자광사(慈光寺)가 위치한 계룡산이 ‘간산(艮山)’이기 때문이며, 스님의 역학사상의 핵심이었던 정역도 간방(艮方)과 간도수(艮度數)를 중심으로 지축이 바로 서고 역사의 종시(終始)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중악(中嶽)’으로 불린 계룡산은 ‘간산(艮山)’이라고도 하였다. 계룡산 갑사(甲寺)의 삼성각 주련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걸려있다.
鷄化爲龍甲天下 닭이 용으로 변하니 천하의 으뜸일세.
三閣莊嚴護十方 삼성각이 장엄하여 시방세계 옹호하고
艮山回運降靈祥 간산(艮山=계룡산=한국)에 운이 돌아와 신령스런 서기가 내림에
萬年明德薦馨香 만년토록 밝은 덕성 그 향기를 널리 풍기리라.
스님은 자신이 ‘간산(艮山)’이라는 의식을 확고히 가지고 있었다. 필자가 최근에 확보한 스님의 19세 당시 썼던 「간산필첩(艮山筆牒)」에 보면 발문에 ‘간산산인(艮山散人)’이라 밝히고 있다. < 탄허스님 서(書) 간산필첩(艮山筆牒) - 출가전 (19세 당시, 1933년작) >
탄허스님이 한국의 미래를 역학의 원리에 입각하여 ‘간방(艮方)’의 미래로 전망한 것들을 모아보면 아래와 같다.
地球가 成熟됨에 따라 後天 時代는 結實 時代로 變하는데 이 結實을 맡은 方位가 艮方이며 艮方은 地理的인 八卦分野로 보면 바로 우리 韓國이다. 艮은 方位로는 東北間이며 樹木으로는 結實이며 人類로는 少男이며 性質로는 道德 즉 그치는 것이다. 東北은 晝夜의 交替 또는 冬春의 交替도 된다. 그러므로 밤이 다하고 낮이 오는 中間이며 겨울이 다가고 봄이 오는 中間이다. 그러므로 艮은 方位로도 始終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結實은 뿌리의 結果니 뿌리가 始라면 열매는 終이다. 일단 結實이 되고나면 뿌리의 命令을 듣지 않는 것이 結實이다. (......)
우리가 이 道德分野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 先祖들이 數千年 동안 남을 侵害해 본적이 없고 오직 壓迫을 忍耐하고 살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積善之家에 必有餘慶하고 積惡之家에 必有餘殃이란 말과 같이 우리 先祖가 積善해 온 餘蔭으로 우리 韓國은 畢竟 福을 받게 될 것이다. 于先 이 宇宙의 變化가 이렇게 오는 것을 學術的으로 展開한 이가 韓國人外에 있지 않으며 이 世界가 滅亡이니 심판이니 하는 무서운 火湯속에서 人類를 救出해 낼 수 있는 方案을 가지고 있는 이도 韓國人外에 또 다시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韓國은 世界的인 神都 다시 말하면 精神首都의 根據地라 하여도 過言이 아닐 것이다. 始萬物 終萬物이 艮에서 일어난다면 世界的인 人類를 救出할 精神文化가 어찌 韓國에서 始하고 終하지 않으랴.
주역을 지리학상으로 전개해 보면 우리나라는 간방(艮方)에 해당되는데 지금 역의 진행 원리로 보면 이 간방의 위체에 간도수(艮度數: 주역에서 인간과 자연과 문명의 추수 정신을 말함)가 비치고 있다.
인류 역사의 시종이 지구의 주축(主軸)부분에 위치한 우리 땅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인류역사의 종결이라고 한 것은 그 안에 새로운 인류 역사의 시작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보더라도 이미 1백년 전부터 하나의 결실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역학의 원리는 오래 전부터 이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결국 시종을 함께 포함한 간방의 소남인 우리나라에 이미 간도수가 와 있기 때문에 전 세계의 문제가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시작되고 끝을 맺게 될 것이다.
파멸의 시기에 우리나라는 가장 적은 피해를 입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한반도가 지구의 주축(主軸) 부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정역 이론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지구 중심에 있고 ‘간태(艮兌)’가 축(軸)이 된다고 한다. 일제 시대 일본의 유키사와(行澤) 박사는 계룡산이 지구의 축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앞으로 계룡산이 지구의 축이 될 것이라는 일본학자의 언설은 의미심장한데 탄허스님이 대전 유성 학하리에 자광사를 창건한 것은 스님의 모든 사상이 집결된 심혈을 기울인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스님의 간산사상(艮山思想)의 중심혈이 바로 자광사였던 것이다. 스님이 노년에 쓴 문장에는 거의 ‘추성봉하(樞星峰下)’를 명기하고 있다. 자광사가 있었던 학하리의 산이 계룡산에서 가까운 추성봉이었다. 추성봉은 정역에서도 매우 중시하는 것으로 북두칠성의 머리부분에 있는 첫 번째 별인 ‘천추(天樞)’를 다르게 부르는 말이다. 하늘의 중심주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북극성을 찾을 때 북두칠성의 첫 번째 별인 천추(天樞)와 두 번째 별인 천선(天璇)을 잇는 선의 5배를 올라가면 북극성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미원국의 핵심 주축이 되며 정역학에 입각해서 보면 지구가 바로 설 때의 간태축(艮兌軸)의 중앙에 포국하게 되는 지점이다.
탄허스님의 역학사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앞으로 정역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스님이 강의때마다 정역을 거론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학계에서는 아직 정역에 대한 연구가 매우 부진하다. 30년전에 입적한 스님의 견해에서 한 걸음도 나아간 정역학 연구성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지만 정역에는 ‘십일귀체시(十一歸體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