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학(呑虛學)’의 골수(骨髓)와 종지(宗旨)
- 탄허대종사 탄신백주년을 ‘탄허학(呑虛學)’ 연구 원년(元年)으로 -
문광 (文光)
< 목차 >
Ⅰ. 서언(序言) - ‘탄허학(呑虛學)’의 21세기적 의미
Ⅱ. 탄허학(呑虛學)의 체(體)
1. 무애(無碍)와 회통(會通)
1) 화엄(華嚴)의 사사무애(事事無碍) 사상
2) 유불선(儒佛仙) 삼교회통(三敎會通) 사상
2. 향상(向上)과 귀일(歸一)
1) 제일구(第一句)로의 향상일로(向上一路)
2) 회교귀선(會敎歸禪)의 경허-한암 선풍(禪風)의 완성
Ⅲ. 탄허학(呑虛學)의 용(用)
1. 교육사업(敎育事業)과 역경불사(譯經佛事)
1) 인재양성의 일승보살행 - 유교무류(有敎無類)와 회인불권(誨人不倦)
2) ‘한국적 역경(譯經)’ - 현토직역과 종지중심(宗旨中心)의 주석채택
3) 서문(序文)에 담은 골수법문과 대중강설의 사자후
2. 간산사상(艮山思想)과 민족불교(民族佛敎)
1) 탄허 역학사상에 나타난 우환의식(憂患意識)
2) 중국역(中國易)에서 한국역(韓國易)으로 축의 전환
- 주역(周易)과 정역(正易)의 통합을 통한 지기(知幾)와 전망(展望)
3) 탄허 미래학의 특질과 상징
- ‘간산(艮山)’과 ‘추성봉(樞星峰)’으로 계승된 불국토사상
Ⅳ. 미결(未結)의 결어(結語)
- ‘21세기 한국학(韓國學)’의 새로운 지평으로서의 ‘탄허학(呑虛學)’
Ⅰ. 서언(序言) - ‘탄허학(呑虛學)’의 21세기적 의미
탄허 택성(呑虛 宅成, 1913-1983년) 대종사는 평소에 “나는 당대(當代)의 일은 하지 않는다. 명전천추(名傳千秋)하는 일만 하겠다.”고 했다. 과연 스님의 사자후대로 당신의 종신사업(終身事業)이 후대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지 귀추가 주목되는 가운데 대종사 사후 30년 한 세대가 흐른 금년 탄신백주년을 맞아 스님의 사상과 학술에 관한 다방면에서의 활발한 재조명 행사가 진행중에 있다.
필자가 10년 이상 스님의 사상을 꾸준히 사숙(私淑)해 온 바에 의하면, 스님의 사상을 남김없이 화반탁출(和盤托出)하기 위해서는 다방면에 걸친 매우 깊은 학술과 기나긴 시간동안의 연구가 수반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단지 올 한해만의 이벤트성의 학술대회나 제반행사만으로는 스님의 진면목(眞面目)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으므로 탄허사상의 고준한 가치와 시의성(時宜性)에 대한 국가와 조계종단의 깊은 인식의 토대위에서 ‘탄허학(呑虛學)’ 전문연구자들의 방대한 양성이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에서 ‘탄허학(呑虛學)’이라 함은 필자가 이 지면을 통해 처음 사용하는 말이 될 것이다. 우리 한국에는 원효학(元曉學), 퇴계학(退溪學), 율곡학(栗谷學), 다산학(茶山學) 등과 같은 개인의 사상에 대한 연구학문이 이미 존재해 왔다. 이렇듯 한 개인을 학술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에는 단순히 그 일인(一人)의 사상을 연구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그가 살았던 동시대의 모든 사상과 정신, 그리고 사회상과 인간학 전반을 이해하고 통찰할 수 있게 됨으로써 그 시대의 전반적인 정서와 수준, 관심사와 생활모습을 총체적으로 고찰하여 그 시대전체가 가지는 장점과 한계를 개관해 볼 수 있게 된다.
지난 20세기 백년간의 근현대 한국사(韓國史)를 놓고 보면 인간사유가 빚어낸 모든 총체적 양상들이 충돌하고 접합했던 이 한반도라는 필드위에서 수없이 많은 사상가와 인물들이 명멸해 갔다. 격변하는 근·현대라는 시·공간속에서 동서(東西)와 고금(古今)이 교직(交織)되고 온갖 사상(思想)과 주의(主義)가 난무한 가운데 일제시대와 6.25전쟁, 4.19와 5.16, 산업화와 민주화의 급변하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감내하고 마침내 맞이해낸 것이 한국인의 21세기이다.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모든 역사적 경험과 모험이 이 한반도에서 펼쳐졌으며 그러한 역사의 도전과 시련을 극복하고 마침내 지구촌에 되먹여 준 사태가 바로 오늘날의 한류(韓流)라는 것이다. 이 ‘한류’라는 말에는 지난 세기를 오롯이 살아낸 한국인 전체의 한(恨)과 인욕바라밀의 정진(精進)이 숨어있다. 금발의 외국인이 한국어를 따라 노래 부르고, 지구 반대편에서 한국의 드라마를 시청하며, 점점 더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을 찾아 관광을 오고 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세계 1등이 목표임을 거리낌없이 말하고 있고, 자신감과 에너지가 넘치며, 백두대간 곳곳에는 생기(生氣)와 활력(活力)이 충만해 있다. 하지만 이러한 표면적 한류의 시대가 지나고 좀더 깊이 한국이라는 나라가 세계사의 주역으로 발돋음할 때 어떤 외국인이 ‘한국정신(韓國精神)’은 과연 무엇이며, 한국의 부사의(不思議)한 성장과 굴하지 않는 생명력의 근저(根柢)에는 어떠한 사상이 있냐고 물어오는 날이 멀지 않았음을 예견할 때, 우리는 과연 한국의 정신이 무엇이라고 명쾌하게 답변할 수 있겠는가?
필자는 한류의 뿌리가 되는 한국인의 사상과 정신을 연구하는 한국학(韓國學)의 한 학인(學人)으로서 그 해답을 탄허사상(呑虛思想)에서 찾고자 한다.
한국인의 정신을 고려시대까지의 불교역사 전체를 버려둔 채 조선 유교 오백년에서만 찾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한국인의 사상을 수승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교의 선사상(禪思想)이나 화엄사상 하나로만 일축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한국정신(韓國精神)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담보하면서 한국정신(韓國精神)의 총화(總和)를 죄다 함유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할 것이다. 20세기 한국사상의 정수(精髓)를 20세기 한국의 실존인물에서 상징적으로 찾아본다고 할 때 필자는 그 하나의 해답으로 탄허스님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지금 현대는 융합(融合)과 회통(會通), 협업(協業)과 소통(疏通)의 시대이다. 20세기 한국사상사에서 한 개인을 놓고 볼 때 사통팔달(四通八達)·종횡무진(縱橫無盡)하여 광대실비(廣大悉備)하게 총합적 학술을 전개하여 ‘학(學)’이라는 칭호를 부여할 만한 대표적 인물로 탄허스님을 제외하고 과연 누구를 거론할 수 있겠는가!
유불선(儒佛仙) 삼교의 동양정통사상을 하나로 일이관지(一以貫之)하고, 거기에 기독교와 서양사상까지 겸하여 융합회통(融合會通)하면서도, 인간의 영원한 과제인 심성수행(心性修行)을 선교겸수(禪敎兼修)로 온전히 수행·제시하고, 인재양성과 역경·교육사업의 보살행까지 총망라한 20세기 한국학(韓國學)의 ‘학종(學宗)’은 단연 탄허스님이었다.
게다가 한국의 미래상에 대해서 주역(周易)과 정역(正易)의 방대한 역학(易學)적 근거위에서 한국인의 밝은 미래에 대해 희망의 비젼을 미리 제시함으로써 유사이래 제반의 민족사상(民族思想)과 불국토설(佛國土說)에 점정(點睛)의 일획을 그어준 희유의 미래학자가 바로 탄허스님이었다.
한국학(韓國學)의 전형을 담보하고 있는 대도인을 지척에 두고도 불교학계를 비롯한 한국의 인문학·철학·종교학계에서의 탄허사상 연구는 그동안 너무나 지지부진했다.
퇴계가 손자에게 보낸 편지에는 “기각첨도수(棄却甛桃樹)하고 순산적초리(巡山摘醋梨)로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 집의 단 복숭아나무는 버려두고 온 산을 돌아다니며 똘배를 따고 다닌다는 뜻이다. 한국학의 위대한 선학(先學)이자 불교학의 위대한 선각(先覺)인 탄허스님은 내버려두고 외국에서 수입된 학문을 바탕으로 한국학을 구성하고 미국·유럽과 일본·티벳·동남아를 주유(周遊)하며 불교학을 배우러 다니는 실정이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근거리에 불과 얼마전에 위대한 선지식이 바로 곁에서 호흡하면서 방대한 학술을 전개해 두었는데도 방외로 치지도외해 두었던 것을 탄식하는 것이다.
맹자 의 맨 마지막장에는 이와 관련된 아주 의미심장한 맹자의 한 마디 한탄이 실려 있다. 요·순·우·탕·문·무·주공·공자(堯舜禹湯文武周公孔子)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성인은 5백년에 한 번씩 출세함에 반드시 그 사이에 직접 보고서 안 견이지지(見而知之)가 있었고 들어서 안 문이지지(聞而知之)가 있었는데 공자에서 맹자까지는 백 여년이 흘렀건만 “아무것도 없으니 앞으로도 아무것도 없겠구나(然而無有乎爾, 則亦無有乎爾)”라는 한탄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 탄허스님이 입적한지 한 세대가 흘렀다. 지금 우리 곁에는 탄허스님에게 직접 지도받고 배운 법제자들과 출·재가의 많은 견이지지자(見而知之者)들이 생존해 있다. 이들이 생존해 있을 때 반드시 탄허학(呑虛學)이 하루속히 출범해야 한다. 그래야만 필자와 같이 스님에게 직접 배우지 못한 문이지지(聞而知之)의 후학(後學)들이 올바른 탄허사상을 후대에 정확하게 전해 남길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 지체하면 문이지지자(聞而知之者)들만의 억측과 상상으로 행여 탄허스님의 종지(宗旨)가 왜곡되거나 잘못 전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쩌면 맹자의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無有乎爾)’는 자조섞인 푸념을 하는 후세인이 나올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금년 탄허스님 탄신백주년을 탄허학(呑虛學) 연구 원년(元年)으로 삼아서 앞으로 탄허사상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공부하는 많은 수행자들이 나와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Ⅱ. 탄허학(呑虛學)의 체(體)
최근 들어 탄허스님에 대해 세간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스님의 사상과 학문에 관한 것이라기 보다는 북극물이 녹고 지진·해일과 같은 기후변화와 지구대변혁이 일어나는 것 등과 관련된 미래예지에 대한 부분들이다. 2012년에 출간된 탄허록 같은 서적이 그 대표적인 것으로 이 역시 탄허사상을 구성하는 주요한 성분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엄밀하게 판단해 보건데 탄허사상의 핵심되는 본체(本體)가 아닌 체(體)을 바탕으로 이를 활용한 대용(大用)의 범주일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처럼 스님의 사상의 핵심[體]과 그것의 현실적 활용[用]이라는 측면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는 것은 스님의 사상적 층차와 본말(本末)을 전도하지 않을 수 있는 중요한 방편이 되므로 필자는 탄허학(呑虛學)의 체(體)와 용(用)의 구분을 설정코자 한다.
송대(宋代) 성리학의 원류인 정이천(程伊川, 1033-1107년)의 「역전서(易傳序)」에는 “체와 용이 한 근원이며, 드러나고 은미한 것에 간극이 없다”는 “체용일원 현미무간(體用一源 顯微無間)”이라는 일구(一句)가 있는데, 이는 주자(朱子, 1130-1200년)에게 금과옥조와 같이 전승되어 이기론(理氣論)의 핵질을 구성하고 있지만, 사실 이 체용론(體用論) 역시 중국 화엄종 4조인 청량 징관(淸凉 澄觀, 738-839년) 국사의 화엄경소에서 비롯된 것이 주지의 사실인 바 체용(體用)의 활용은 본래 탄허스님의 중심사상 가운데 하나인 화엄사상에 그 본거를 두고 있으므로 탄허학을 체용(體用)의 대대(待對)로 설정함에는 이견이 없을 것으로 본다.
우리가 스님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 핵심이 되는 골수(骨髓)와 종지(宗旨)부터 우선 확고하게 정초(定礎)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스님의 정체성을 학승(學僧)이니 강백(講伯)이니 학자(學者)니 선승(禪僧)이니 혼동하지 않을 수 있다. 체(體)적인 면에서의 정체성과 용(用)적인 측면에서의 정체성으로 구분해서 보게 되면 스님의 다양한 층위를 가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이 한층 더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사상이었는지에 대해서 명확히 판가름할 수 있게 된다.
필자는 단도직입적으로 탄허학의 골수와 종지를 이루는 체(體)로 임제삼구(臨濟三句)의 제일구(第一句)로의 향상일로(向上一路)와 경허(鏡虛)-한암(漢巖) 선사로부터 이어지는 회교귀선(會敎歸禪)의 선풍(禪風)을 꼽고자 한다. 즉 스님의 골수는 선사(禪師)인 것이다. 스님은 해결되지 않는 의문들을 해결하기 위해 선문(禪門)에 출가했고 출가하자마자 상원사(上院寺) 선원에서 3년을 묵언참선 수행정진으로 승려생활을 시작했다. 경(經)을 보아도 선원에서 보았고, 경(經)을 배워도 강백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스승인 한암선사에게 배웠다. 때문에 이력을 보는데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것으로 종지(宗旨)를 간파하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이는 바로 역경(譯經)의 요체가 종지(宗旨)로 직입(直入)할 수 있게 하고자 한 번역의 원칙을 낳게 한 것이었다.
이와 아울러 필자는 탄허스님에 한해서 교학사상(敎學思想)인 화엄사상(華嚴思想)과 유불선(儒佛仙) 삼교회통사상을 용(用)이 아닌 체(體)로 보았다. 선(禪)과 교(敎)가 본래 둘이 아니며 유불선 삼교가 본래 하나라는 무애(無碍)와 회통(會通)의 사상은 스님의 골수를 형성한다. 스님에게 있어서는 단순히 용(用)으로서의 경전이 아니며 단순히 불교보다 저열한 유교·도교가 아니기 때문에 탄허학의 체(體)는 무애회통(無碍會通)의 사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무애의 원리는 당연히 화엄의 사사무애(事事無碍)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선(禪)이 체(體)요, 교(敎)가 용(用)이며, 불교가 체(體)요, 유교·도교가 용(用)이 될 것이다. 이는 옳은 말이다. 하지만 탄허스님에 있어서는 선교합일(禪敎合一)이 체(體)요, 삼교회통(三敎會通)이 체(體)이다. 그 체(體) 가운데에서 다시금 층차가 있으니 선(禪)은 체중체(體中體)요, 교(敎)는 체중용(體中用)이며, 불교는 체중체(體中體)요, 유교·도교는 체중용(體中用)이 된다. 선(禪)과 화엄(華嚴)은 그 근본이 하나이며, 삼교성인의 본심(本心)은 그 근본이 하나이므로 원융무이(圓融無二)를 탄허학(呑虛學)의 체(體)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수한 용(用)자리는 교(敎)에 대한 역경과 강설, 그리고 삼교사상의 번역과 교육인 것이다. 물론 용지체(用之體)는 불교경전의 역경과 강설이겠으며, 용지용(用之用)은 유교·도교 경전의 번역과 특강이 될 것이다. 스님의 이러한 장엄한 대용(大用)의 광활함에서 역학사상(易學思想)에 기반한 미래예지와 민족적 불교사상이 펼쳐졌던 것이다.
1. 무애(無碍)와 회통(會通)
1) 화엄(華嚴)의 사사무애(事事無碍) 사상
2012년에 탄허스님의 귀중한 동영상 법문이 하나 새로이 발굴되었다. 1982년 9월 15일부터 16일까지 양일간 미국 프로비덴스 선센터에서 홍법원 10주년 기념으로 세계평화고승대법회가 열렸는데 미국의 숭산스님이 한국의 탄허스님을 초빙하여 법문을 청한 것이다. 이 양일간의 법문을 당시로는 귀했던 비디오로 촬영한 것을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는 교민이 보관하고 있다가 도서출판 교림(敎林)의 서우담 선생에게 기증하여 그 편집본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법회일시를 잠시 살펴보자면 스님의 입적일이 1983년 6월 5일임을 떠올리면 불과 9개월 전에 있었던 법회임을 알 수 있다. 미국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고승으로 초빙되어 법석에서 설파한 사자후임을 감안할 때 스님의 골수를 그대로 담고 있다고 보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스님은 평소에 법상에 올라서 법을 설하는 것을 “미친 사람들이나 법상에 오르기 좋아한다”고 했던 경허스님의 일화를 들어 말과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서는 한 마디도 할 말이 없음을 강조한 것을 상기해 볼 때 청법의 법좌에서 양일간 총 18분(동영상 분량) 정도의 짧은 설법은 스님의 골수(骨髓)와 종지(宗旨)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스님의 대중특강으로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될 만큼 유명했던 것은 2회에 걸쳐서 있었던 오대산에서의 특강이었다. 그 하나는 스님이 1977년 겨울 오대산 월정사에서 화엄경 출간을 기념하여 열린 화엄특강법회였고 또 하나는 1982년 11월부터 입적하던 해인 1983년 1월 말일까지 열렸던 동양삼교사상과 화엄을 포함한 불교경전특강이었다. 스님의 마지막 특강이었던 뒤의 설법은 약 2달이상 열린 것으로 탄허사상의 전모가 드러난 것인데 이 특강의 핵심중의 핵심이 바로 2012년에 발굴된 미국 홍법원에서의 1982년 동영상 법문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스님은 이 법석에서 자신의 화엄사상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일 큰 병통을 말 많은 것으로 봅니다. 어저께도 한 20분 동안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였습니다. 그런데 또 오늘 쓸데없는 소리를 좀 해 달라고 숭산스님이 그랬습니다. 사실 말이 있는 것 보다는 없는 것이 낫고 말이 있어가지고 없는 것보다는 애초에 없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횡야설 수야설 법문을 해 놓으셨는데 거기에서 가장 깊은 학설이 무어냐 하면은 사사무애도리(事事無碍道理)라는 것입니다. 즉 화엄학의 사사무애도리.
스님은 부처님 49년 설법 전체 가운데 가장 깊은 학설로 거두절미하고 화엄학의 사사무애도리(事事無碍道理)를 거론했다. 이것이 탄허교판(呑虛敎判)의 전모인 것이다. 탄허교판의 핵심은 바로 화엄의 사사무애사상을 최고의 교학으로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스님이 일찍이 누누이 언급한 바 있다.
화엄의 도리는 그리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불가불 부처님은 49년 동안 설법을 하셨던 것이다. 결국 돌이켜보면 화엄경 설법 이외의 49년 설법은 화엄의 도리를 알리기 위하여 설해진 방편이라고 보아야 한다. 아함부나 방등부 경전은 유치원이나 중학교 과정 정도가 될 것이고 화엄은 대학원 정도라고나 할까. 그러니 인류를 구할 사람이라면 최고의 학문 최고의 사상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부처님은 명백히 화엄의 도리를 가지고, 당신께서 설하시고자 하신 법문의 핵심을 삼으셨다고 볼 수 있다. 거듭 말하지만 그 밖의 다른 법문은 화엄에 이르게 하기 위한 과정으로 차제설법을 하신 것이다. 다시 비유로 말하면 화엄경은 큰 바다에서 노는 것이고, 기타의 법문은 강물에서 노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팔만대장경을 다 보았다 하더라도 화엄경 도리를 모르면 모두가 단편에 불과하다. 큰 도리를 보고 나면 무엇이든 그 속에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까지는 이해할 수 있고 인식할 수가 있지만 사사무애(事事無碍)라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태산(泰山)을 자기 콧구멍 속으로 집어넣는다고 할 경우 콧구멍이 넓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태산이 축소되는 것도 아닌데도 태산이 콧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태산이 콧구멍 속으로 들락날락 하면서도 하나도 거리낌이 없는 것, 그것이 사사무애법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인들은 사사무애도리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오직 이 우주만유가 일진법계화(一眞法界化)된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되지를 못하는 것이다.
스님은 화엄의 사사무애법계도리(事事無碍法界道理)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못박고 있다. 그래서 미국에서의 법문에서도 부처님 49년 설법가운데 가장 깊은 법문이 바로 화엄의 사사무애도리라고 설파한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미국에서 일반인들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고 일진법계화(一眞法界化)된 사람이 아니면 알기 어렵다고 했던 그 사사무애도리를 의상조사 법성게의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과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두 가지에 대한 명쾌한 해석을 통해 명징하게 요약하고 있다.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이라는 것이 하나 가운데 일체, 하나가 곧 일체라는 것이 비슷할 것 같지마는 극히 좀 다릅니다. 물론 사사무애도리(事事無碍道理)를 표현하는 방법으로서는 같습니다마는 내용이 좀 틀린 것은 무어냐 하면 ‘일중일체(一中一切)’라 하면 하나가 그 개체가 살아가지고 있으면서 전체를 싸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중일(多中一)’이라는 것은 전체 많은 것이 자기 개체를 다 가지고 있으면서 그 하나를 싸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 방안에 전등을 백개 천개를 켜 놓는다고 봅시다. 백개 천개를 켜 둔다면 그 광명이 하나하나가 전부 이 방안에 꽉 차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 등의 광명이 백천 등의 광명에 장애가 안 되면서 서로 포함되어 있고 또 백천 등의 광명이 자기 개체를 살려 가지고 있으면서 그 한 등의 광명을 장애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소식입니다. 하나 가운데 일체요 일체 가운데 하나라는 것입니다.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이라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라는 말은, 예를 들면 우리가 육지의 물 한 방울을 바다에다 던진다고 봅시다. 육지의 물 한 방울을 바다에다 던진다면 육지의 물 한 방울 개체가 없어짐과 동시에 전체의 바다 맛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다의 전체 맛이 육지의 물 한 방울 맛이고 육지의 물 한 방울 맛이 전체의 바다 맛이라는 말입니다.
그럼 아까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한 등잔이 천백 등잔의 광명을 장애하지 않고 서로서로 함용(含容)해 있다는 것은 개체가 살아 가지고서 낱낱이 개체의 광명이 우주에 꽉 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이라는 것은 개체가 죽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 개체가 저 쪽에 가면 자기 개체가 없어지면서 저쪽 것과 자기 것이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사무애도리를 표현한 것이예요. 화엄학의......
이처럼 사사무애법계도리는 하나의 전등 불빛이 다른 전등 불빛을 만날 때처럼 두 개체가 살아서 서로 서로 장애가 되지 않고 포용하는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의 함용의(含容義)와 육지의 물이 바다의 물을 만날 때처럼 두 개체가 서로 만날 때 한 개체가 완전히 죽어서 다른 개체와 하나가 되는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의 상즉의(相卽義)로 정리했다. 앞의 내용에서 ‘태산이 콧구멍으로 들어간다’거나 ‘수미산이 겨자씨속에 들어간다’는 법문은 모두 사사무애도리인데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의 함용의(含容義)를 통해서 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탄허스님의 화엄사상, 특히 사사무애사상이 빛을 발하게 됨을 알 수 있다. 21세기는 온통 화엄의 사사무애도리로 가득 차 있다. 태산이 콧구멍으로 들어가는 것 뿐만이 아니라 캐나다에서 피겨경기를 하는 김연아 선수가 손바닥만한 스마트폰 속에서 일중일체의 함용의의 진리대로 살아서 사사무애의 진리를 현현하고 있다. 컴퓨터를 비롯한 정보통신의 모든 문명의 이기는 화엄을 현실문명화한 것들이다. 서양은 온통 화엄을 공부하고 연구하기에 바쁘다. 역대 최고의 흥행을 기록한 ‘아바타’라는 3D 영화는 바로 화엄의 법계연기를 영화한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진리는 변하지 않으니 화엄을 공부해야 일상생활속에서 진리를 구가할 수 있다고 탄허스님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 바 있다.
나는 화엄경을 우리 민족의 교전(敎典)으로 삼았으면 한다. 각급 교육기관에서 정도에 따라 경전을 분류하여 배우게 하면 어려울 것이 없다고 본다. 화엄에 의하여 민족이 자각하고 정화된 정신으로 각성운동을 전개한다면 모든 성취는 자연히 그 안에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우리의 지혜스러운 청년들에게 이 법(화엄)을 가르치고 싶다. 그래서 진리에 의한 평화, 번영의 국토를 이 땅 위에 실현하고 싶다.
인간의 우주관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하지만, 우주 본체의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주시대에 인간들은 가치의 기준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자아를 잃은 현대인에게 있어서 화엄사상은 하나의 실마리를 찾아 주는 열쇠가 될 것이다. 그러면 화엄사상은 현대 우주시대에 어떠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가? 부처님은 이 우주가 끝없이 넓은 공간이라고 일찍이 설파하셨다. 무한대의 우주 속에 티끌이 존재하며 그 티끌 속에도 역시 우주가 존재한다. 또 영겁의 시간 속에 한 순간이 존재하며 역시 순간 속에서도 영겁이 존재한다. 이러한 사상은 현대의 우주시대 서막을 장식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입증되었다. ...... 우리는 화엄사상을 어려운 것으로만 생각해 멀리할 것이 아니다. 일상 생활 속에 진리의 길이 있고 해탈과 열반의 길이 있다. 진리는 가까운 데 있다.
화엄사상은 7세기 원효, 의상이 공부하던 지나간 시대의 예전 학문이 아니다. 바로 지금 우리 눈앞에서 현현하는 영원불멸의 진리이다. 화엄학은 구학문이니 새로운 불교학을 연구해야 한다는 이들은 탄허학의 핵심인 화엄사상, 특히 사사무애사상에로 다시금 원시반본(原始反本)해 보아야 한다. 기나긴 세월동안 유사이래 최고의 불사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스님의 화엄경 역경(譯經) 대작불사의 속내는 더욱 발전해 나가는 문명의 성장속에서 하나하나 차례로 밝혀지리라 본다.
2) 유불선(儒佛仙) 삼교회통(三敎會通) 사상
필자는 탄허스님의 삼교회통 사상을 스님의 법호를 빌어 ‘탄(呑)적 가풍’이라고 명명한 적이 있다. 삼교회통의 근본원리는 바로 앞에서 살핀 화엄의 사사무애사상이다. 바다와도 같은 화엄의 무애사상을 바탕으로 유교와 도교 역시 방대하게 포용하고 통섭했음을 강조하기 위해 ‘탄(呑)적 가풍’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화엄적으로 표현해 본 것이다. 스님은 유교·불교·도교에 대해서 불교 우위적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서 특별히 ‘불도유(佛道儒)’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 적이 없다.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여 ‘유불선(儒佛仙)’이라고 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유불도(儒佛道)’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지만 스님이 ‘유불선(儒佛仙)’이라는 표현을 고집했던 데는 ‘도(道)’라는 말이 유불선 삼교에서 서로들 끌어다 쓰고 있고 삼교가 표현하는 동일한 본체를 나타내기 때문에 도교만의 전매특허 술어로 사용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82년 미국 홍법원 법문에서도 법문 시작과 함께 바로 아래와 같이 유불선 삼교회통 사상을 피력했다.
우리가 우주 삼라만상을 돌이켜보면 이 차별은 어떻게 정리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지만 허공자리에 앉아서 볼 것 같으면 이 우주 삼라만상이 한 덩어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육지에 앉아서 보면 백천중류의 흘러가는 이 물이 수가 없이 한정이 없지만 바다에 앉아서 보면 한 덩어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팔만대장경 교리로 볼 것 같으면 그 학설이 한정이 없지만 원교(圓敎), 즉 화엄학(華嚴學)에 앉아서 볼 것 같으면 한 덩어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한 덩어리 되고 마는 그 자리를 동양사상에 있어서 유불선(儒佛仙) 삼교의 표현이 불교는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 우주 만법은 하나로 돌아간다, 유교에서는 “정일집중(精一執中)이라” 정미롭고 한결같이 해서 중도를 잡는다, 도교에서는 “득일만사필(得一萬事畢)이라” 하나를 얻을 것 같으면 만사는 다 끝난다,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술적으로 보면 수천만권의 학설이 벌어져 있지만 그 내용을 간추려 볼 것 같으면 심성(心性), 마음심(心)자 성품성(性)자 두 자리 가지고 이야기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명심견성(明心見性)” 마음을 밝혀서 성을 본다, 마음이라면 총체적 명사이고, 성(性)이라고 하면 마음의 본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유교에서는 “존심양성(存心養性)”, 마음을 두어서 성을 기른다. 도교에서는 “수심연성(修心練性)” 마음을 닦아서 성을 단련한다. ‘심성(心性)’ 두 글자를 가지고서 이야기 한 것은 유불선이 같지만 단, 유교에서는 존양(存養), 둘 존자 기를 양자, 도교에서는 수련(修練) 닦을 수자 단련할 련자, 불교에서는 명견(明見), 밝을 명자 볼 견자, 그러면 존양과 수련과 명견이라는 그 술어에서 벌써 유불선의 심천(深淺)은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인이 평을 하기를, “유식근(儒植根)하고” 유교는 총체적으로 비판하면은 나무뿌리를 심는 것이라면, “도배근(道培根)하고” 도교는 나무뿌리를 북돋는 것이다. 불교는 “석발근(釋拔根)이라” 나무뿌리를 뽑아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순서가 나무뿌리를 심은 뒤에 북돋는 것입니다. 만일 뿌리를 뽑아버린다 할 것 같으면 심는 것과 북돋는 것이 끊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를 도표 하나로 간략히 표현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삼교회통
(三敎會通) |
유교 (儒敎) |
도교 (道敎) |
불교 (佛敎) |
성(性)자리 |
존심양성 (存心養性) |
수심연성 (修心練性) |
명심견성 (明心見性) |
유식근 (儒植根)
|
도배근 (道培根) |
석발근 (釋拔根) |
정일집중(精一執中)
|
득일만사필(得一萬事畢) |
만법귀일(萬法歸一) |
< 탄허스님의 삼교회통(三敎會通) 사상 >
스님이 유불선 삼교의 회통사상을 선양하기 위해 번역·출간한 책으로는 정재유학사(靜齋劉學士)의 「삼교평심론(三敎平心論)」과 모자(牟子)의 「이혹론(理惑論)」과 함허득통(函虛得通) 스님의 「현정론(顯正論)」을 묶은 발심삼론(發心三論)이 있다.
스님은 늘 “천하에 두 도가 없고 성인에게는 두 마음이 없다”는 뜻의 “천하무이도 성인무양심(天下無二道 聖人無兩心)”이라는 문구를 휘호하길 즐겨했다. 이 구절은 순자·해폐(荀子·解蔽)편에 처음으로 등장하며 송대(宋代)의 소자유(蘇子由)와 명태조 주원장(朱元璋)과 이탁오(李卓吾) 등을 거쳐 조선조의 함허득통(函虛得通) 스님의 「현정론(顯正論)」으로 이어졌다가 탄허스님에 와서 본격적으로 천양된 일구(一句)이다. 삼교동도론(三敎同道論)을 주창하는 사상가들에게는 대표적 표어와도 같이 쓰여진 구절로 삼교성인(三敎聖人)의 근본심이 불이(不二)함을 강조한 말이다.
스님은 유불선 삼교가 합일될 수 있는 근본이 ‘심성(心性)’의 ‘수련(修練)’으로 ‘귀일(歸一)’하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특히 ‘성(性)자리’ 하나로 유불선 삼교가 관통(貫通)된다고 보았다.
심(心)이라고 하면, 성(性)과 정(情)을 합한 명사입니다. ‘성(性)’이라는 것은 나의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 즉 우주가 미분되기 전을 말합니다. 우리의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이나 몸이 나기 전이나 우주가 생기기 전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마음의 본체를 ‘성’이라고 할 때 중생이나 부처님이나 성인이나 범부나 똑같다는 말은, ‘성’자리를 가지고 하는 말이지 그냥 덮어놓고 똑같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이 마음의 본체라면 ‘정’은 같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입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으로 말하자면 한이 없지만 철학적으로 그것을 구별한다면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칠정(七情)이 됩니다. 그러나 ‘성’은 칠정이 일어나기 전 진면목(眞面目)이며, 본래 언어·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만, 굳이 말한다면, 강령(綱領)의 큰 것으로 불교에서는 사덕(四德)이라고 합니다. 부처님 마음자리에 갖춘 사덕, 즉 진상(眞常)·진락(眞樂)·진아(眞我)·진정(眞淨), 유교에서는 그것을 인의예지(仁義禮智)라고 하는데 범부와 소승은 이 사덕을 거꾸로 봅니다.
스님이 자신의 저작들 가운데에서 ‘성(性)자리’라는 말로 통섭되는 동일한 표현이라고 했던 말들을 모아 보면 아래와 같다.
성(性)자리 = 중(中) = 미발(未發) = 불성(佛性) = 각(覺) = 마음의 본체 = 천하의 근본(大本) = 우주의 핵심체 = 우주 미분전 = 우주 생기기 전 = 몸이 나기 전 = 시·공간이 끊어진 자리 = 한 생각 일어나기 전 = 정(情)이 일어나기 전 진면목(眞面目) = 언어·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 49년 설법하고도 한마디도 설한 바 없는 자리 = 모든 생각이 끊어진 자리 = 선악시비의 분별이 붙을 수 없는 자리 = 모양이 끊어진 것 = 시·공이 끊어진 허령불매(虛靈不昧)한 자리 = 당체가 본래 없는 것 = 성인이나 범부나 똑같은 것 = 불교의 사덕(四德:常樂我淨) = 유교의 인의예지(仁義禮智) = 대학의 지선(至善) = 통체일태극(統體一太極) = 노자의 천하모(天下母) = 선종(禪宗)의 최초일구자(最初一句子) = 최청정법계(最淸淨法界) = 원상(圓相) = 우주창조주 = 기독교 하나님 = 성부(聖父) |
<‘성(性)자리’를 통한 탄허스님의 삼교회통 사상 >
탄허학(呑虛學)의 체(體)가 ‘회통(會通)’에 있다함은 이상과 같이 유불선 삼교를 각기 다르게 보는 여느 시선과 달리 인간의 동일한 근본 심성(心性)자리를 회통하여 통찰함에 그의 사상적 입각처가 위치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스님은 삼교(三敎)간의 심천(深淺)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언설 또한 결코 빼놓지 않는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쌍계사 진감국사 비문에서 밝힌 “공자는 그 단서를 발했고 석가는 그 극치를 다했다”는 “공발기단 석궁기치(孔發其端 釋窮其致)”라는 언명을 극찬한 대목은 바로 이렇듯 불교에 방점을 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