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은 성性의 자리, 범부는 정情의 마음자리
마음자리에서 보면 인간성人間性과 불성佛性은 둘이 아니다. 그런데 인간성이다, 불성이다, 신성神聖이다 하여 구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느 자리에서 쓰냐에 달려 있다. 성인은 그 모든 것이 성性의 마음자리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쓰기에 불성이니, 신성이니 한다.
반면에 범부는 모든 현상적 존재가 성의 자리에서 나온 것임을 모르고 쓰기에 인간성이라 한다. 이 둘의 차이점은 성인은 성性의 자리에 앉아서 쓰는 것이고, 범부는 정情의 자리에 앉아서 쓰는 데 있다.
성의 자리에서 쓰는 사람에 따라 성 자리를 이름하여 ‘중中’이니 ‘도道’라 한다. 도는 ‘사람이 당연히 가는 길’을 의미하고 다른 말로는 ‘덕德’이라고도 한다. 덕이란 “마음을 닦아 얻은 진리[得於心之謂德]”를 말한다. 또 진리란 모양이 끊어졌다는 뜻인데 온갖 다른 이름의 대명사로 불린다. 대명사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 어리석은 사람은 달을 가리키면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본다.
여기에서 대명사는 마음자리를 표현하기 위한 다양한 방편들이다. 이를테면 그 대명사에는 하나님, 도, 진리 등이 있다.
이렇게 성의 자리를 일러 주기 위해 수많은 대명사가 나온 것이다. 예컨대 ‘김탄허’라고 할 때 ‘김탄허‘는 대명사이지 김탄허라는 실물은 아니다. ‘김탄허’라고 부르는데 못 알아들으니 ‘동국대학교 선원장禪院長’이라고 하고, 그래도 못 알아들으면 ‘오대산 주인’이라 하고, 그래도 또 못 알아듣는다면 우리 아버지 이름을 빌려 ‘아무개 아들’이라 한다. 또 우리 형님 이름을 빌려와 ‘아무개 아우’라고 한다.
이렇게 김탄허다, 동국대 선원장이다, 오대산 주인이다, 누구 아들이다, 아무개 아우다, 라고 하는 것, 그 모든 것들은 대명사이지 실물이 아니다. 김탄허의 실물은 현재 이 글을 쓰고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는 존재 그 자체다. 그 자리는 명사가 끊어진 상태다. 이처럼 성 자리는 본래 명자名字로 얘기할 수가 없는 자리다.
결론적으로 인간성과 불성은 둘이 아닌 것인데 성인은 성의 자리를 알고 쓰니 하루 종일 희로애락애오욕의 칠정을 써도 칠정이 없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런데 범부는 시공이 끊어진 성의 자리를 모르고 쓰므로 항상 망상에 허덕이면서 고해苦海에서 생멸을 거듭하게 된다. 성의 자리를 깨닫는 것을 가리켜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맹자》의 진심장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마음을 극진히 연구하는 자는 그 성리性理를 아나니, 그 성리를 알면 천리天理를 안다.”
유교 서적 수천 권을 종합해 놓으면 존심양성存心養性 또는 진심지성眞心知性으로 정리할 수 있다. 또 불교 서적 수천 권을 종합해 놓으면 명심견성明心見性, 즉 “마음을 밝혀 성을 본다”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도교 서적 수천 권을 모아 핵심을 정리하면 수심연성修心練性, 즉 “마음을 닦아서 성을 단련한다”가 된다.
결국 도교의 수련修練, 유교의 존양存養, 불교의 명견明見, 이 모두가 심성心性을 말한 것이다. 즉 철학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과정에서 조금 차이가 있을 뿐 모두 같은 것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므로 옛 조사祖師의 말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유교가 뿌리를 심는 것이라면 도교는 뿌리를 북돋워 주는 것이고, 불교는 뿌리를 뽑는 것이다[儒植根, 道培根, 釋拔根].”
심고 북돋우는 것은 점진적인 것으로, 뿌리를 뽑게 되면 결국 심고 북돋울 것이 없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