檀君思想과 佛敎
일물(一物)이 여기에 있으니 일물(一物)은 현존일념(現存一念)이다. 명상(名相)이 끊어 졌으되 고금(古今)을 관통(貫通)하고 일진(一塵)에 저(處)하되 육합(六合)을 포위(包圍)하였다. 안으로는 중묘(衆妙)를 함(含)하고 밖으로는 군기(群機)를 응(應)하며 삼재(三才)에 주(主)가 되고 만법(萬法)에 왕(王)이 되나니 탕탕(蕩蕩)하여 비할 데 없고 외외(巍巍)하여 짝이 없는 것이다. 신기(神奇)롭다 하지 않겠느냐? 부앙(俯仰)하는 사이에 소소(昭昭)하고 시청(視聽)하는 즈음에 은은(隱隱)하며 현현(玄玄)하다 하지 않겠느냐? 천지(天地)보다 먼저 하되 그 시(始)가 없고 천지(天地)보다 뒤에 하되 그 종(終)이 없으니 공(空)한 것이냐, 있는 것이냐? 그 소이(所以)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佛敎)의 전체(全體)를 축소(縮小)한 말이라 하여도 과언(過言)이 아닐 것이다.
우리 국토(國土)의 고유(固有)한 사상(思想)은 국조(國祖)를 여의고 찾아 볼 수 없으며 국조(國祖)의 사상(思想)은 『천부경(天符經)』을 여의고 또한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천부경(天符經)』은 천지인삼재(天地人三才)를 주(主)로 해서 三三은 九로 하고 九九는 八十一로 하여 八十一字가 된 것이다. 비록 이 적은 문자(文字)지만 그 내용(內容)에 있어서는 주역십사권(周易十四卷)의 축소판(縮小版)이라 하여도 과(過)히 허언(虛言)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천지부모(天地父母)를 우(宇)라 하고 왕고래금(往古來今)을 주(宙)라 한다면 우주(宇宙)는 시공(時空)일 따름이다. 시공(時空)을 여의고는 만유가 존재(存在)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시공(時空)이 일어나기 전(前)을 『유교(儒敎)』에서는 ‘통체일태극(統?一太極)’이라 하고 『도교(道敎)』에서는 ‘천하모(天下母)’라 하고 『기독교(基督敎)』에서는 ‘성부(聖父)’라 하고 『불교(佛敎)』에서는 ‘최초일구자(最初一句子) 또는 최청정법계(最淸淨法界)’라 한다. 그러고 보면 기본(其本)은 一이다. 一은 무엇일까 一은 시공(時空)을 만들어낸 현존일념(現存一念)인 것이다.
그러므로 『천부경(天符經)』은 일점(一點)의 철학(哲學)이 종횡(縱橫)(ㅣㅡ)으로 즉 양의(兩儀)가 되고 양의(兩儀)가 사상(四象)(ㅗㅛㅜㅠ)으로 分한 것이다. 우리 국문학(國文學)의 자모음(字母音)이 원방각(圓方角)(ㅇㅁㅿ천지인(天地人))으로 분(分)해진 것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우주(宇宙)의 일원도수(一元度數)가 십이만구천육백년(十二萬九千六百年)이지만 백천(千百)번 번복하여도 우리의 현존일념(現存一念)은 변(變)치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왕만래(萬往萬來)하여 용변(用變)이언마는 부동본(不動本)이라 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보면 천겁(千劫)을 지나도 옛이 아니요 만세(萬歲)에 달(亘)하되 길이 이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역(周易)』엔 선천이천하위(先天而天不違)하고 후천이봉천시(後天而奉天時)라 하였으며 『불교(佛敎)』엔 “선천이무기시(先天而無其始)하고 후천지이무기종(後天地而無其終)”이라 하였다.
『천부경(天符經)』은 주역문자(周易文字)가 일어나지 않은 문왕이전(文王以前)의 학설(學說)로써 처음에 一은 시무시(始無始)의 一로 기두(起頭)하고 마지막 一은 종무종(終無終)의 一로 결미(結尾)하였다. 이렇게 보면 천지(天地)가 일지(一指)요 만물(萬物)이 일마(一馬)라 하여도 과언(過言)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종교(宗敎) 어떠한 철학(哲學)이 이 양구(兩句)속에 포함(包含)되지 않으랴!
이렇게 보면 우리 국조(國祖)는 유도석(儒ㆍ道ㆍ釋) 삼교(三敎)와 기독교(基督敎)가 오기 전에 벌써 학술적(學術的) 으로도 우리 강토(疆土)의 민족주체(民族主體)를 심어 주었다고 보겠다. 이것이 나의 불교(佛敎)에서 보는 천부경(天符經)의 일단(一端)이다.
1980년 여름
오대산 월정사 조실 탄허